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스 데이비스 (문단 편집) === 일렉트릭 마일스 데이비스 === 사실 새 퀸텟 활동 후반기에 마일스는 이미 기존의 어쿠스틱 연주 형태에 싫증을 내고 있었고, 오히려 당시 음반 차트를 휩쓸고 있던 [[제임스 브라운]]과 [[아레사 프랭클린]] 등 [[소울 음악|소울]] 가수들이나 [[지미 헨드릭스]]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슬라이 스톤]] 같은 이들이 이끌던 [[록밴드]]의 음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마일스는 길 에반스의 주선으로 헨드릭스 생전에 공동 앨범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마일스가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된 적도 있었다. 재즈 계에서 전기악기의 중요성은 이미 예전부터 조금씩 강조되고 있었는데, 이미 1940년대에 찰리 크리스천이 일렉트릭 기타를 재즈에 도입했고 [[레이 찰스]]는 1950년대 후반 울리처 모델의 일렉트릭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재즈에서 전기악기의 비중은 어쿠스틱 악기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게다가 재즈를 누르고 젊은층의 광범위한 대중성을 획득한 록 음악은 바로 그 전기악기의 엄청난 음량 증폭과 이펙터 등을 사용한 광범위한 음색 조절 능력으로 수많은 음악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마일스는 그 때까지도 유명한 재즈맨이기는 했지만, 재즈 씬 밖으로 나가면 '아저씨 누구심?' 이라고 묻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고립감을 느끼기도 했다. 마일스는 전기악기와 장비들의 새로운 음색과 다양한 기능들을 적극 활용해 록의 대중성을 자신의 음악에 도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록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새로운 음악을 '재즈 록' 이라고 분류하던 평론가들에게 "내 음악이 흰둥이 따위가 하는 그런 건 줄 아냐?" 라며 상당히 언짢아했을 정도였다. '킬리만자로의 여인들' 을 녹음한 1년 뒤인 1969년 2월 18일에 예전의 퀸텟 체제를 유지한 채 여러 전기악기 주자들을 대동한 특이한 세션이 행해졌는데, 킬리만자로에서 이미 연주한 바 있었던 코리아와 홀랜드 외에 [[조 자비눌]]과 [[존 맥러플린]]이 각각 일렉트릭 오르간과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로 참가한 옥텟(8중주단) 편성이었다. 하지만 이번 세션은 자비눌이 가져온 자작곡인 In a Silent Way를 빼면 뭔가 기존 작곡의 개념에서 틀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고, 새로 영입된 두 연주자들도 마일스가 뭘 하려는지 별로 말이 없어서 꽤나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게다가 이 날 녹음된 분량은 겨우 18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음반 하나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물론 이틀 뒤인 2월 20일에도 같은 멤버들을 대동하고 'The Ghetto Walk' 와 'Early Minor' 두 곡을 더 녹음했지만, 정작 새 앨범인 ''''인 어 사일런트 웨이(In a Silent Way)'''' 에 사용된 녹음들은 2월 18일 세션에서 만들어진 것들 뿐이었다.[* 이 때 빠진 2월 20일 녹음은 2001년에 'The Complete In a Silent Way Sessions' 라는 CD 세 장짜리 세트에 묶여 정발되었다.] 턱없이 짧은 분량의 녹음을 음반 한 장 분량으로 늘려 편집한 인물은 프로듀서였던 테오 마세로였는데, 이미 마일스와 길 에반스의 공동 작업에서 몇 차례 겪어 봤던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보수적이었던 재즈 팬이나 평론가, 뮤지션들 뿐 아니라 나름대로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 이들에게도 이 앨범은 꽤나 당혹스러운 물건이었다. 너무 똑같은 부분만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엽적인 지적에서부터 '마일스가 흑인의 재즈를 버리고 백인의 록에 아첨하고 있다' 는 식의 비난까지 다양한 [[디스]]가 이어졌지만, 마일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실 똑같은 부분이 반복된다는 지적이야 원체 녹음된 분량이 적은 것을 마세로가 애써 늘린 탓에 나왔다고 쳐도, 가공할 만한 보컬이나 미칠듯한 드럼 비트, 기타의 강렬함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는 18~19분 짜리 통짜 연주곡들을 대뜸 록이라고 규정짓는 것도 꽤나 억지였다. 아무튼 이 앨범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음향과 고요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조심스럽게 제작되었음에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전기악기와 음향을 구사하는 연주로 확실히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물건이 되었고, 1969년 8월 19~21일 3일 동안 녹음된 후속작인 더블 앨범 ''''비치스 브루([[Bitches Brew]])'''' 에서는 그 발상을 더욱 추상적이고 전위적으로 밀어붙여 수많은 이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전 앨범에서 연주한 맥러플린과 코리아, 자비눌 외에 [[잭 드조넷]]과 레니 화이트, 하비 브룩스, 베니 모핀 등 다른 연주자들을 추가해 13명이라는 대규모 그룹으로 녹음했고, 마일스는 트럼펫에 마이크를 연결하고 에코나 딜레이 이펙터를 사용해 다른 전기악기들처럼 음량과 음색의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이 앨범에서도 마일스는 자신의 의도나 음악의 방향성 등에 대해 별 코멘트를 하지 않았고, 녹음 상황에 맞춰 간혹 간략한 지시를 내렸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미리 준비된 작곡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희박해졌고, 연주자 개개인의 직관이 합쳐 빚어낸 집단 창작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거기에 '인 어 사일런트 웨이' 에서처럼 테오 마세로의 주관이 들어간 편집까지 더해졌고, John McLaughlin을 제외한 대부분의 곡이 10분 이상의 대곡으로 다듬어졌다. 심지어 타이틀 곡인 Bitches Brew는 재생 시간이 27분에 달하는, 단일 재즈 작품으로는 굉장히 방대한 규모가 되었다. 비치스 브루는 발매된 직후 미친듯이 팔려나가며 동시에 인 어 사일런트 웨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논쟁 [[떡밥]]을 풀어놨고, 심지어 보수적인 재즈 팬들은 환불 소동을 빚기도 했다. 그 때까지 마일스에게 실드를 쳐 주던 평론가나 뮤지션들까지도 마일스와 테오 마세로에게 이해할 수 없다거나 돌았냐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미리 작곡되어진 음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도전이나 스튜디오 녹음의 최대 강점인 편집을 창작 영역에까지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확실히 어느 누구보다 앞선 발상이었고, 훗날 [[앰비언트]]나 사이키델릭 같은 장르의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 앨범 이후 그 동안 세컨드 퀸텟 멤버로 마지막까지 쭉 자리를 지켜오던 웨인 쇼터가 조 자비눌과 함께 [[웨더 리포트]]를 결성하기 위해 탈퇴하면서 마지막 퀸텟의 맥도 같이 끊기고 말았다. 마일스는 잔뜩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키스 재릿]]이나 [[스티브 그로스먼]], [[개리 바츠]], [[데이브 리브먼]], [[마이클 헨더슨]], [[빌리 콥햄]], [[피트 코지]] 등 새로운 연주자들을 재빨리 섭외해 계속 이런저런 그룹을 이끌면서 일렉트릭 시대를 계속 이어갔다. 1970년에는 전설적인 흑인 권투 선수 [[잭 존슨(권투선수)|잭 존슨]]에게 바치는 헌정 앨범인 ''''A Tribute to Jack Johnson'''' 을 발매했고, 그 직전인 2월부터 4월까지의 공연들도 훗날 라이브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1972년에는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비롯한 유럽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있던 작곡가들이 내놓은 공간 지향적 음악에서 영향을 받아 ''''온 더 코너(On the Corner)'''' 라는 음반을 발표했는데, 기존의 전기악기 외에도 [[인도]]의 전통악기들인 [[시타르]]와 [[타블라]]를 추가해 당시 유행하던 [[아시아]] 음악의 영향도 포괄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전작들과 달리 영 좋지 않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마일스는 빡쳐서 음반사가 마케팅을 잘못 했느니 뭐니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마일스 입장에서는 꽤 억울했겠지만 [* 온 더 코너는 현재 상당히 고평가 받는 앨범이며, 비치스 브루와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그루브와 비트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대우를 받는다.], 당시에는 이미 마일스보다도 좀 더 록 지향적이고 대중 친화적인 방향으로 향하던 웨더 리포트나 리턴 투 포에버,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 등의 퓨전 그룹이 더 인기를 끌고 있었고, 마일스는 허비 행콕이나 칙 코리아, 조 자비눌, 존 맥러플린 등이 자기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실컷 열폭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별 소용은 없었고, 마일스 자신도 마약과 술의 과용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 모두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On the Corner 앨범 발매 열흘 뒤 마일스는 고속도로 출구에서 시속 100km로 우회전을 하다가 본인의 람보르기니 미우라를 전복시키는 사고를 냈다. 발견 당시 두 다리가 모두 부러져 뼈가 바지를 뚫고 튀어나왔으며, 코카인 봉지가 터져 피와 코카인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마일스 본인은 '그 교통 사고 이후로 모든 것이 흐려지기 시작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콜럼비아에서도 채산성 문제를 이유로 기존에 발매된 앨범 외의 수많은 스튜디오&라이브 녹음을 음반으로 만들지 않았고, 마일스도 1975년 [[일본]]에서 열린 투어와 귀국 후 진행한 몇 차례의 공연을 끝으로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오사카]] 공연 실황을 담은 '아가르타(Agartha)' 와 '판게아(Pangaea)' 두 라이브 앨범 외에는 후속 작품도 사실상 없었고, 다급해진 콜럼비아는 그 동안 풀지 않았던 미공개 녹음들을 부랴부랴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묶어서 내놓아야 했다. 1976년 봄부터 1979년 여름까지, 마일스는 3년이 약간 넘는 시간 동안 그야말로 [[방구석폐인]]이 돼 술과 마약으로 시간을 허비하며 나락에 떨어진 듯 살았다. 간혹 찾아오는 지인들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억지로 마련된 극소수의 세션에서도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주며 재기할 기미도 없던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